백제의 행정구역은 백제의 26대 왕이었던 성왕이 왕권의 안정과 집권력 강화를 위해 계획적으로 만든 도읍지인 사비도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비도성은 나성으로 둘러싸였는데, 이 나성 안에 왕궁과 각종 행정관서가 있었습니다. 나성 내부를 상부, 중부, 하부, 전부, 후부의 5부로 편제하고, 각 부를 다시 5항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돌은 부여 동남리에서 발견된 ‘상부전부천자차이’라는 글자를 새긴 표석입니다. 파손된 채 발견되어 글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상부와 전부가 이곳에서 나뉜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상부’와 ‘전부’가 구분되는 지역을 표시한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도로 표지석에 해당합니다.
웅진도성인 공주의 공산성에서는 옻칠 갑옷과 철제 갑옷, 옻칠 말 갑옷과 말 머리 가리개, 여러 종류의 칼과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정관 19년’이라는 붉은 색으로 쓴 글자가 남아 있는 갑옷은 2011년 공산성의 왕궁 부속 시설인 저수시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정관’은 중국 당나라의 연호로, 정관 19년은 백제의 의자왕 재위 5년째인 645년을 가리킵니다. 이 무렵은 백제가 당에 사신을 보내며 교류하던 때입니다. 이 갑옷을 포함한 무기들 위에 1미터가 넘는 볏짚을 덮어 둔 것으로 보아 이 무기들을 의도적으로 감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사기』에는 나당 연합군에 사비성을 빼앗긴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옮겨 당나라 군대와 맞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기와를 조립해서 만든 길이 40m에 이르는 도수관이 확인되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지표수를 모아 정화시켜 용수로 사용하기 위한 목곽 수조와 연결되어 있어 당시 체계적인 도수 시설이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비도성에서는 도수관의 용도로 사용된 토제품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기와를 전용해 쓰기도 하고, 처음부터 토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사례도 많습니다. 틀에서 분리한 원통모양의 수키와를 절반으로 가르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거나, 일반적인 수키와에 비해 일부러 크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도수관의 기능이 용수를 보내는 배수관인지 오수를 내보내는 배수관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웅진도성에도 이와 같이 물이 잘 빠지도록 도로 옆에 배수로를 설치했습니다. 백제의 발달된 도시 계획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부소산 남쪽 기슭의 시가지 북쪽 끝에는 기와로 만든 기초 위에 만든 3동의 건물 터가 있었습니다. 전달린 토기와 굽달린 사발, 접시 등 회색 토기가 여러 겹으로 포개거나 묶은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건물 안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 한쪽으로 쏟아진 것으로 보이며, 이런 종류의 그릇은 제사나 종교 의식에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 건물을 제기를 보관했던 창고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굽달린 사발은 사비기 이후 상위 계층의 수요 폭증 등으로 인해 규격성과 정형성을 갖추면서 도성 내의 생활용기로 급부상했습니다. 뚜껑을 덮었을 때 몸체와 이어지도록 음각선이 시문되어 있고, 몸체 하단에는 '七'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 7세기 전반에 재위한 백제의 30대 왕, 무왕武王이 조성한 왕궁성입니다. 1989년부터 해마다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2015년 발굴 조사에서 백제 사비도읍기 왕궁의 부엌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삼국시대 부엌의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엌이 별도의 건물로 독립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아궁이와 굴뚝이 달린 부뚜막, 식기 보관 시설이 있습니다. 건물 터 안의 타원형 구덩이에는 음식물을 조리하기 위한 쇠솥 두 점과 숫돌 세 점, 크고 작은 토기 다섯 점이 놓여 있었습니다. 구덩이 옆에서는 불에 탄 흙과 쇠솥을 걸어 놓고 사용해 검붉게 변한 벽체, 그리고 바닥면에 다량의 숯이 깔려 있는 지점도 두 군데가 확인되었습니다.
부여 군수리에서 발견한 이 토제품은 호랑이 모양으로 만든 변기로 호자라고도 부릅니다. 호랑이가 앞다리를 세우고 상체를 들어 입을 크게 벌린 채 고개를 약간 돌린 모양이며,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중국 고대 기록에는 산신이 호랑이의 입을 벌리게 하고 소변을 보았다는 전설과 황제가 행차할 때 시중드는 하인이 호자를 들고 뒤따랐다는 내용이 전해져 호자를 남성이 사용한 변기라고 추정합니다. 호자는 중국 육조시대에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호자도 중국 서진 말에서 동진 초, 즉 4세기에서 5세기 무렵에 만든 것입니다. 이를 수입해서 백제 귀족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복원 작업 도중 탑의 심주석 사리공에서 사리호舍利壺를 포함한 사리장엄구가 나왔습니다. 사리호는 외호와 내호, 사리병의 삼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연꽃무늬와 넝쿨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금동제 외호는 왕흥사의 은제 사리호와 닮아 백제 사리기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제 내호는 외호와 유사하지만 크기로 작고, 뚜껑과 항아리가 붙은 일체형입니다. 내호 안에 있던 사리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리로 만든 사리기이지만, 발견 당시 뚜껑을 제외하고는 형태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리호는 구슬, 장신구, 동제 합 같은 다양한 공양품과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사리봉영기는 금판의 앞뒷면에 도자刀子를 이용하여 음각하고, 각 획을 따라 주사朱唦를 입혀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전체 193자로 앞쪽에는 99자, 뒤쪽에는 94자를 새겼습니다.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德積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639)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을 정확히 밝힌 것입니다. 미륵사 서탑 창건의 주체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임이 밝혀져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설화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삼원식三院式인 미륵사의 창건에 선화공주를 포함한 서로 다른 발원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비도성의 중심에 있던 정림사지에서 중국 남북조시대의 소조상과 매우 유사한 소조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목탑 터에서 나왔습니다. 정림사 창건 이후에 세운 다른 사찰들이 목탑 터에서 소조상이 출토되고, 또한 이후 사찰의 가람배치도 정림사와 같은 1탑 1금당식 가람에서 확장된 구조라는 사실로 보아 정림사가 백제 불교 사찰의 시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소조상 가운데 중형의 봉보주보살은 중국 양나라와 백제의 사비도읍기, 일본 아스카 시대에 유행했던 양식이며, 정림사에서 발견된 ‘농관籠冠을 쓴 인물상’은 중국 북위北魏시대 낙양洛陽 영녕사永寧寺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글은 중국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점령한 뒤 백제 왕도의 중심에 위치한 정림사 오층석탑에 전투에서 세운 공을 2126자의 전서체篆書體로 기록한 것입니다. 탑의 1층 탑신 사방으로 네 면씩 모두 16면에 남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글자를 새긴 독특한 탑비이다. 여기에는 당 고종 현경 5년, 즉 660년 8월 15일에 작성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뒤 웅진성에서 의자왕을 사로잡은 7월 18일, 그리고 항복 의례를 행한 8월 2일과 멀지 않은 시점입니다. 당나라가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왕과 신하 등을 포로로 잡아간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옛 수도 한가운데 위치한 정림사에 백제의 멸망을 상징하는 사실을 새긴 것은 백제 멸망 이후 옛 백제 도읍의 상황 등 시대적 분위기를 말해 줍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다양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1층 옥개석 중앙의 적심부에 있는 2개의 네모난 사리공과 기단부 심초석에 한자 ‘품品’ 자 모양으로 뚫어 만든 3개의 네모난 사리공에 있었습니다. 유리제 사리병과 금제 사리함은 기법과 무늬가 2009년에 발견된 미륵사지 서탑 사리장엄과 유사합니다. 짧은 선이 채워진 연꽃무늬는 사비도읍기 백제에서 국왕과 귀족들이 애용한 문양입니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의 무왕이 지금의 익산을 일컫는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해 제석정사帝釋精寺를 지었는데, 639년 큰 벼락과 비로 불당과 부도가 모두 불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석정사 칠층목탑의 사리장엄으로 수정 사리병, 동판의 금강반야경, 목칠함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과 매우 유사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습니다.
1919년 부여 부소산성의 송월대에서 발견된 이 불상은 청동 위에 도금鍍金해서 만든 것입니다. 커다란 광배 안에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을 함께 주조한 일광삼존불로 6세기 후반에 유행한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존불은 연판을 간략하게 음각한 반구형의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머리와 손이 신체에 비해 큰 편이며 이목구비 윤곽은 단순합니다. 오른쪽 협시보살상은 합장한 자세이며, 두터운 천의 자락은 본존과 마찬가지로 U자형입니다. 왼쪽 협시보살상은 머리 부분만 남아 있으나 오른쪽 보살상과 같은 형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단의 끝이 뾰족한 광배는 불꽃무늬로 장식했으며, 본존불 위에 화불을 표현했습니다. 광배의 뒷면에 ‘정지원이 죽은 아내를 위해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저승길을 잘 가게 했다’는 내용의 글을 새겼습니다.
1991년 부여 부소산성 동문 터에서 나온 이 금동 광배는 부처님의 몸에서 발산되는 진리와 지혜의 빛을 상징화한 것으로, 머리에서 나오는 빛인 두광頭光으로 추정됩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인 신광身光과 별도로 만들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반가사유상의 광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광배 중앙에는 불상과 연결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 장방형의 홈이 있습니다. 두 겹의 금동판을 결합해서 제작했는데, 앞의 판은 투조透彫 기법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광배 중앙에는 크고 작은 연꽃잎을 교대로 배치하고 돌출시켜 입체적으로 표현했으며, 연꽃무늬 주변에는 화려한 넝쿨무늬를 둘렀습니다. 연꽃무늬와 넝쿨무늬 사이, 그리고 넝쿨무늬 테두리는 작은 구슬로 장식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짧은 선과 작은 점을 반복적으로 새겨 입체감을 더했습니다. 광배 뒷면에는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 쓴 ‘하다의장치불何多宜藏治佛’이라는 여섯 글자가 적혀 있는데, 이는 ‘하다의장’이라는 사람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사비도읍기 백제의 왕궁 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금동광배입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 주변을 불꽃무늬로 장식한 배 모양의 거신광擧身光입니다. 두광의 중앙은 연꽃잎으로 장식하고, 광배 주위는 불꽃무늬를 도드라지게 표현해서 입체감을 더했습니다. 광배의 중앙에는 두 개의 방형 구멍이 있는데, 불상을 결합하기 위한 장치로 보입니다. 이 광배의 가장 큰 특징은 광배 양쪽에 좌우 대칭으로 3개씩 6개의 고달이처럼 생긴 귀가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국 북위 불상의 광배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삼국시대의 다른 금동광배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백제와 북위의 교류 관계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자료입니다.
이 사리장엄구는 부여에 있는 왕흥사 목탑 터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리를 목탑 터의 기둥 받침돌인 심초석 사리공에 봉안하는 것은 여기에서 처음 나타난 방식입니다. 사리공 안에는 금제 사리병, 은제 사리호, 청동제 사리함으로 구성된 사리기 일습이 있었습니다. 특히 청동제 사리함 표면에 577년에 해당하는 ‘정유년 2월 15일에 백제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사리장엄구를 봉안한 연대와 발원자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양나라의 무제가 538년 장간사長干寺에 쌍탑雙塔을 세우고 불사리를 안치할 때, 왕후와 비빈을 포함한 백성들이 금은 팔찌 등 진귀한 보물을 희사해 채워 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흥사 목탑 터 심초석 주변에서 발견된 8,000점이 넘는 옥구슬과 장신구 같은 공양품 역시 의례에 참석했던 왕족을 비롯한 귀족들이 바친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치미는 고대 동아시아 목조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붕의 장식 기와로 부여 왕흥사 동쪽 승방(僧房)으로 보이는 건물 터의 남북 양쪽 끝에 올렸던 것입니다. 남쪽 치미는 윗부분만, 북쪽 치미는 아랫부분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하나로 만든 뒤 상하로 나누어 가마에서 구워 낸 것으로 보입니다. 치미에 표현된 연꽃무늬가 수막새나 벽돌에 있는 문양과 일치해 6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적으로 꼬리 부분을 하늘로 향하게 표현해 마치 새가 꼬리를 세워 날아갈 것 같은 형상입니다. 몸통에는 점토 띠로 구름무늬를 만들어 붙였으며, 종대에는 여덟 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 장식판을 붙이거나 마름모 모양의 꽃 장식을 대롱으로 찍어 장식했습니다. 배면에는 초화무늬와 구름무늬를 음각했으며, 주변에 연꽃무늬 장식판을 따로 붙여 화려함과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깃 부분에는 2단마다 2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이는 실용성과 장식미를 더하기 위한 장치로 여겨집니다. 백제 사비도읍기의 기와 제작 기술과 건축 양식, 최고 수준의 장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1971년 무령왕릉을 조사하면서 발견한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의 지석으로 왕비의 지석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두 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토지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고 이를 돌에 새긴 매지권買地券입니다. 왕의 묘지석 앞면에는 백제 사마왕이 523년인 계묘년癸卯年 5월 7일에 세상을 떠나서 525년인 을사년乙巳年 8월 12일에 무덤에 안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기록은 짧고 간단하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 풍습이 담겨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 머리맡에 있던 관꾸미개입니다. 이 관꾸미개는 관모 좌우를 장식했던 것으로 중국 역사책 『구당서』에 기록된 ‘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글의 금꽃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왕의 관꾸미개 문양은 역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인동초 줄기를 곡선으로 나타내고, 인동초 이파리의 끝이 균일하게 모여 화염을 이루게 했으며, 그 속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표면에는 금제 달개를 가득 매달아 화려함을 더하고 맨 아래쪽은 둥글게 말아 비단 모자에 고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실로 꿰맬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왕비 관꾸미개는 왕의 것과는 다르게 각각의 문양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달개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화면 구성도 조금 달라 문양 가운데 꽃병이 있고, 그곳에서 연꽃 한 송이가 피어오르는 구도입니다. 중국 남조나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불교 미술의 모티프인 연꽃과 불꽃 무늬를 백제의 미감으로 재창조한 것입니다.
무령왕릉의 청동 거울은 널방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왕 쪽에서는 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文鏡)과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이, 왕비 쪽에서는 수대경(獸帶鏡)이 나왔습니다. 똑같은 틀로 만들어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거울들이 우리나라와 일본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거울을 국가 간의 교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뒷면의 거울걸이를 중심으로 4각의 구획이 있고 그 주위에 신령스러운 동물을 표현한 방격규구신수문경입니다. 이 거울에 묘사된 사람은 신선을 표현하듯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반나체에 삼각형의 하의만 입은 채 손에는 창을 들고 네 마리의 큼직한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입니다. 손잡이 주위에는 사각형의 윤곽을 만들고 작은 돌기들을 배열한 다음 그 사이에 12간지의 글자를 새겨 놓았습니다. 신선과 동물을 표현한 바깥쪽 테두리에는 부귀와 안락,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尙方作竟眞大好上有仙人不知老渴飮玉泉飢食棗壽(如)金石兮 상방에서 만든 거울은 참으로 좋아 옛날 선인들이 늙지 않았고 목마르면 옥 샘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 먹으며 쇠, 돌과 같이 긴 생명을 누렸도다”.
소나무를 얇게 가공한 칼 모양의 이 목간은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먹물로 쓴 글씨는 한쪽 면에만 남아 있는데, 오른쪽 아래에 ‘사사십육四四十六’, ‘삼사십이三四十二’ 부분이 가장 선명하게 관찰됩니다. 이 목간은 구구법의 공식을 차례대로 적은 이른바 ‘구구단 목간’입니다. 남아 있는 내용으로 보아 오늘날과는 반대 순서로 구구단을 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기술자나 관료가 곱셈이 필요할 때 어디서든 손에 쥐고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목간은 한반도에서 실물로 발견된 최초의 구구단 자료로, 일본 나라 지역에서 발견된 8세기 때의 구구표九九表 목간에 비해 1세기 가량 앞선 것입니다. 그 구성과 형태가 유사해 일본 구구단의 원류가 되는 목간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2013년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고려시대의 무덤을 조사하던 발굴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고려시대 석실이라고 생각했던 무덤에서 백제 사비도읍기에 사용된 은제 관꾸미개와 청동제 띠꾸미개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은제 관꾸미개는 백제 사비도읍기에 6품 나솔 이상의 고위 관료가 관모에 착용했던 것으로 주로 도성이 있던 부여 지역에서 출토되어 왔습니다. 남해에서 백제의 관식이 출토되는 이유가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백제의 대외 교류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해는 섬진강을 통해 백제 내륙 지역으로 진입할 수 있고, 백제가 전문 기술자를 적극적으로 파견하며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했던 왜와도 교역에도 유리한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입니다.